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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 삶

예배의 대상에 대한 바른 이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쩌면 내가 바라고 원하는 대로 해주시는 하나님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때론 하나님에 대하여 품는 의문들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나를 부요케 하시지 않는가?' '왜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대로 일하시지 않는가?' 이런 의문들은 인류의 시작이래로 계속 되어온 것입니다. 나름대로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어디에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느껴지거나 내 삶이 기대만큼 잘 나가지 않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원하는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이기를 기대하며 또 반복된 삶을 시작합니다.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

출애굽기 32장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고 없을 때 아론에게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건 또 무슨 황당한 말입니까? 그들은 이미 애굽에서부터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들을 보고 그 분을 잘 알고 있지 않았나요? 10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 등등...... 그런데 갑자기 자기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신(神)으로 생각했나 봅니다. 적어도 신과 같은 존재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직접 하나님과 대면하지 않았고 단지 모세의 말과 모세가 행하는 기적만을 볼 수 있었으므로 눈에 보이는 모세가 그들을 인도하는 신(혹은 신과 같은 존재)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 이상 모세가 보이지 않자 그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자신들을 인도하던 신이 없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아론을 찾아가 자기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의 발단은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였습니다.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신, 금송아지?

(그림: 니콜라스 포우신(Nicolas Poussin 1594~1665)
백성들의 요구에 제사장이었던 아론은 한 술 더 뜹니다. 백성들에게 금 고리를 가져오게 한 후 그것을 녹여 송아지 형상을 만든 후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라고 합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말입니까? 제사장인 아론이라면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일텐데 송아지를 만들어놓고 너희 신이라니 말이 됩니까? 더구나 여호와의 절일 즉, 하나님을 섬기는 날에 우상숭배를 강요하다니요. 과연 아론은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신이 하나님인 것을 모르고 금송아지를 만든 것일까요? 그는 정말 우상숭배를 원했던 것일까요? 아론은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었지만 그도 모세만큼 하나님을 잘 알지는 못했습니다. 아론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는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로다'고 선언한 부분에서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지 그 모양을 이방에서 섬기는 신의 모양을 가져왔을 뿐 다른 신을 섬기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절일에 이 일을 행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아모스와 스데반의 언급

이 사건에 대하여 이후의 성경에 두 군데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모스 5장 26절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기윤과 너희 우상들과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든 신들의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는 구절과 그 구절을 다시 인용한 사도행전 7장 43절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으로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두 구절모두 출애굽기 32장의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금송아지에 대하여 아모스는 식굿과 기윤이라 했고 사도행전의 스데반은 몰록과 레판이라고 했네요. 식굿은 몰록의 장막이라는 뜻이며 기윤은 앗수르의 별신 토성을 의미합니다. 페르시아와 시리아에서 토성을 렘판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기윤대신 레판이라고 했습니다.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단지 그들의 생각대로 형상화하여 섬겼을 뿐이지만 아모스와 스데반은 이방신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우상숭배한 것으로 단정짓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우리가 우리의 생각으로 만들어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보았습니다. 또한 우리가 섬기는 대상에 대하여 올바로 알고 섬겨야 한다는 것도 깨닫습니다. 우리의 필요에 의하여, 우리의 생각으로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님'이라고 만들어 내어 믿고 있지는 않은 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자신을 섬긴것으로 인정치 않고 우상숭배로 결론지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풍요와 다산

이방신들에게 기원하는 주된 주제는 '풍요와 다산'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현실적인 복과 자유로운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에게 요구한 또 다른 하나는 엄격과 규율보다 현실의 복과 자유로운 삶, 아니 그것을 넘은 성적타락과 방탕한 삶을 원했던 것입니다. 모세가 사라지자 불안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해줄 신을 만들 구실로 아론을 압박한 것입니다. 이 사건 이전에 이미 하나님은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말라는 명령을 주셨으나 아론은 그것을 무시하고 백성의 뜻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대로 응답하는 알라딘 요술램프의 '지니'와 같은 존재로 전락시키려는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성전의 우상화

공회에 잡혀간 스데반은 성전을 모독했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스데반은 오히려 유대인들이 성전을 지나치게 신성시하여 우상화하고 있음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아모스의 글을 인용하여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긴 과거 그들의 조상들과 다를바 없다는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외에 어떤 것도 영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그것이 성전일지라도 하나님과 같이 영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동안 성막에서 하나님과 대면하였고 다윗의 장막에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영광의 장소가 되었으나 솔로몬 이후에 성전이 건축되면서 일반인들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다시 단절되었고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성전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스데반은 성전을 신성시하는 것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절일에 금송아지를 섬긴것과 같은 맥락으로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금송아지

우리는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어떻게 저럴수 있을까라고 생각하지만 실상 우리의 삶에서도 우리의 생각대로 하나님을 만들기도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틀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하나님을 맞추려고 하기도 합니다. 어떤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원하는대로 하나님을 왜곡하기도 합니다. 복음은 없고 현실의 복과 성공만을 강조하는 설교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줍니다. 사람들은 좋아하겠지만 하나님은 기뻐하실까요?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대상이 어떤 분인지 올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현대판 금송아지를 만드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